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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

노인복지 혁명_아마추어와 프로가 다른 점(비밀 3)

by 노인생활코디네이터 2024. 10. 24.

  덴마크의 평범한 작은 도시에서

 

  그로부터 2년 후인 1987년의 8월, 나는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덴마크로 갔다. 삿포로 의과대학의 마에다 노부오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서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홀베크라는 도시에 가서 일주일 남짓 체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행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외국 손님은 모르는 어딘가에 몸져누운 노인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어딘가에 모져누운 노인의 집단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경로의 날' 의 칼럼 제목을 '몸져누운 노인이 없는 까닭'이 아니라 '적은 까닭'이라고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도 그 걱정이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고령자들은 자택이나 양호원이 있는 주택이나 일본의 특별양호노인홈에 해당하는 '프라이엠'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일본식의 '와상노인'의 집단은 역시 볼 수 없었다. 죽음이 임박하여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 '오늘은 누워 있고 싶은 기분이어서' 쉬고 있는 사람, 의식불명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사람···. 네 곳의 프라이엠을 돌아다니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오직 4명밖에 보지 못했다.

 

  홀베크, 그곳은 별다를 것도 없는 인구 3만 1천 명의 도시이다.

  마에다 교수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여행을 알선한 코펜하겐 대학의 비욘 홀스타인 조교수가 어릴 적부터 살고 있는 곳이어서 보통의 덴마크인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 같아서였다. 복지의 수준이 덴마크의 275개의 시군구 중에서 '중하'쯤이라는 것도 기자인 나에게는 적절했다.

  가정도우미의 수도 인구 3만 1천명에 대해 138명, 1985년에 방문한 스웨덴의 마르메에 비하면 그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에 비하면 인구당 20배 이상이 된다.

 

 

  남은 힘을 끌어내고 활용한다.

 

  가정도우미의 훈련을 위한 기초교육 지도용 교과서를 보았다. 목차에는 이런 항목들이 있었다.

  ● 몸이 부자유한 사람에 대하여  ● 사회에 대하여

  ● 가정도우미의 법률상의 보상과 의무  ● 질병에 대하여

  ● 간병에 대하여  ● 승하차 요령  ● 시간 배분

  ● 사람을 이해하기  ● 노인을 이해하기  ● 가족을 이해하기

이 남성은 손가락 끝이 조금 움직일 뿐이나 가정도우미의 도움으로 자택에서 혼자 산다.

 

일본의 재택복지. 재택의료는 '튼튼한 며느리'의 헌신에 의지한다.

 

 

  '승하차 요령' 이란 침상에서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보조기구를 사용해 휠체어에 태우거나 침상에 다시 누이는 기술을 말한다(사진 참조). '노인을 이해하기' 란 예컨대 '수발 들기가 지나쳐 남아 있는 능력을 손상하지 않도록' 하며, '잠재능력을 끌어내어 활용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서 나는 이 '잔존 능력의 활용' 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다. 이것은 덴마크의 '고령자 의료복지정책 3원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라고 한다.

  가정도우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훈련된 '프로' 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노인을 슬기롭게 격려하고, 서두르지 않으며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나는 일본에서 노인의 수발을 드는 '며느리' 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며느리는 아들의 부인이다. 신경이 쓰이는 입장이다. 자칫 수발이 지나치게 된다. '잠자리에 누운' 상태에서 음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몸을 닦고, 무엇이든 해 드린다.

  노인을 아기처럼 다루는 병원의 간병사의 모습도 동시에 떠올랐다. "아~~ 하세요. 옳지 옳지. 맛 있지요?" 정다워 보이지만, 교양이 부족하고, 존엄성의 존중을 잊는 그런 간병이 '누워 있는' 상태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장애가 있는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어버이도 마찬가지 과오에 빠져들기 쉽다.

 

 

  그것은 마치 여공애사의 세계

 

  일본에서는 자기 신변을 차릴 수 없는 사람의 수발은 '가족'이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왔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체험해 보지도 못했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는 남성들인 행정관이나 정치가들이 '가족이 수발을 든다' 는 전제하에 복지정책을 수립해 왔다. 그것은 아름다운 풍습으로 해외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현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노동기준법이 여성에게 금지하고 있는 '30킬로그램 이상 무거운 것' 을 매일 들어올려야 한다. 그뿐 아니라 24시간 동안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휴일도 없다. 피로에 지친 나날이 한없이 계속된다. 이건 완전히 여공애사(女工哀史 : 자본주의 초기에 혹사당하던 여직공의 이야기)의 세계이다.

  한편, 가정도우미는 '며느리' 와는 달리 교대제이다.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시간제 근무 제도도 폭넓게 도입하고 있다.

  가정도우미의 일에는 시간대에 따라 바쁠 때가 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으켜 옷을 갈아입히는 시간이나, 따뜻한 식사가 나오는 점심 시간에 바라지할 일들이 몰린다. 이러한 시간대는 어린 자녀를 둔 가정도우미 지원자가 외출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밤이나 휴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주간에 대학 등에 다니면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을 잘 배치하여 24시간을 메꾸는 것이 북유럽들의 방법이었다.

  일본의 시간제 근무에는 '임시고용' 의 뜻이 있지만, 북유럽에서는 정상 근무자든 시간제 근무자든 신분이나 대우 면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일하는 시간과 시간대가 다를 뿐이다. 가정도우미에게는 휴가제도도 있다. 일 때문에 피곤해 지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웃는 얼굴로 활기에 차 있었다. 수발을 받는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이 약보다 휠씬 더 효험이 있을 것이다.

 

  어버이를 병원에 '버린다'

 

  누구든 끝없는 간병지옥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진다.

  일본의 특별양호노인홈은 언제나 절대수가 부족하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를 암암리의 조건으로 하는 일단의 노인병원들이 가족들의 절박한 형편을 받아들이게 된다. 노인홈에 보내는 것은 남의 이목이 두렵다. 친척들이 수발을 들려고 하지 않는 몸쓸 며느리라고 본다면 곤란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병원'은 '체면'이 서므로 편리하다.

  그러므로 본래의 노인의료를 지향하는 노인병원 직원들은 가족들로부터 엉뚱한 상담을 받고 난처해진다. 이런 대화가 <밤부>라는 의료전문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가족 : 우리 집 노인을 입원시키고 싶은데 병상이 있을까요?

  의료사회복지사 :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가족 : 연세에 비해서는 건강한 편이지만 친척들이 의논하여 입원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의료사회복지사 : 재활훈련을 받고 싶습니까?

  가족 : 아닙니다. 이젠 얼마 못 사실 것 같으니 끝까지 돌봐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 의료사회복지사는 아마다 도시나리 씨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대한 의문도 있어 최근 병원을 사직하고 <고령자생활복지상담소>를 개설했다. 아마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서는 가정도우미의 도우미란 명색뿐이지요. 수발드는 사람은 마음 편할 틈도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 버립니다. 며느리 쪽이 먼저 죽을 지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버이를 병원에 버리지요. 그것밖에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버린 가족은 제 발이 저린다. 문병의 발길도 멀어진다. 다음의 사진은 그런 수요에 응한 수용소형 노인병원의 하나이다. 일손의 절약을 위해 문병객이 돌아가면 손이 많이 가는 노인은 침상에 묶어 둔다. 이 병원을 감사하는 가나가와 현의 위생부나 보건소는 이 병원을 '중간 수준의 병원' 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의 병원에서는 '묶는 것'을 '억제'라고 한다. '억제'는 일본의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신문사의 과학부에 있을 때부터 의학분야를 오래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주위 사람들에게서 병원을 선택하거나 병원을 찾기 위한 상담을 자주 요청받고 있다. 최근에 많아진 것이 이런 상담이다.

  "실은 모친을 문병 갔더니 팔에 묶인 자국이 있었습니다. 묶어 두지 않는, 좋은 병원이 없을까요?

  1985년에 내가 사회를 본 국제 심포지엄, "참된 풍요를 위한 도전"의 석상에서 성악가인 시무라 도시코 여사는 친정 어머니를 병원에 맡겼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거기서는 밤에 서성거리는 노인은 손발을 침상에 꽉 묶어 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입원 1개월 만에 금방 의식이 몽롱한 채 누워만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는 노래를 그만두고라도 어머니의 수발을 들 각오로 어머니를 퇴원시켰습니다. 그때 옆 침상의 노인이 전신의 힘을 다해 내 손을 붙잡고 '제발 나도 데리고 가 줘요.' 라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1년 후에는 기저귀도 없어지고 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자리에 계시던 그 노인의 슬픈 목소리와 모습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해외에 알려진 아름다운 '일본형 복지', '가족적 간호' 는 실은 '어버이 버리기', '자식 버리기' 와 표리(表裏)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유대가 강한 북유럽

 

  그렇기는 하나, 어머니의 간호를 가정도우미 등의 직업인에게 위탁하면 부모 자식 간의 유대가 약해지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내가 입에 올렸더니 코펜하겐 대학 사회의학연구소의 이도 히로부미 주임연구원이 한 조사결과를 보여 주었다.

  그 조사는 자식과 다른 집에 살고 있는 덴마크의 고령자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이다. 그에 의하면 '오늘 또는 어제 자식과 접촉했다.' 가 43퍼센트, 2~7일 전이 36퍼센트, 8일~1개월 전이 15퍼센트, 1개월 이상은 겨우 7퍼센트였다.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이 전화로 매일같이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40퍼센트가 1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 70퍼센트가 3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 오히려 일본 쪽이 가족간의 유대가 약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만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