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넓은 진료범위
덴마크에서는 의사도 생활의 현장으로 나간다. '가정의'라는 이름의 전문의들이다. 근래에는 그 가정의들이 모여 실시하는 그룹 진료가 주목을 받고있다. 그런 진료소 중의 하나를 홀베크에서 찾아가 보았다.
입구에는 간판도 아무것도 없다. 문에 '의원'이라는 작은 글자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안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색채의 벽걸이나 커튼, 원목가구가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환자가 앉는 의자도 팔걸이가 달린 등나무제이며 일본의 진료실에서 흔히 보는 값싼 둥글의자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혈압계 등의 검사기기도 색깔이 풍부하여 차갑다거나 아플 것 같은 이미지를 주지 않는다.
여기서는 연수 중인 한 사람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의사가 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오전에 한 사람이, 그리고 오후에 다른 한 사람이 왕진을 나간다. 선임자인 아르민 의사의 오전 왕진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환자 : 프라이엠에 사는 아르츠하이머병인 여성(64세) 진료, 그녀의 입에 수포가 생겨 식사를 못하게 됨.
둘째 환자 : 간병사가 배치된 아파트에 사는 파킨슨병의 여성(87세) 진료. 폐렴증세.
셋째 환자 : 간병사가 배치된 아파트에 사는 휠체어의 류마티스 여성(80세), 발열.
넷쨰 환자 : 아파트에 사는 정신분열증 여성(37세). 향정신성약인 데포제를 주사. 열이 있던 딸(13세)에게도 약 지급.
데포제라는 것은 효과가 거의 1개월 지속되는 주사약으로 먹는 약을 싫어하는 환자에게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의료의 장면은 실로 다양하다. 이만큼의 범위를 다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가정의로서 수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늙어서 집도에 자신이 없어졌다'든가, '부친이 개업의니까'라는 이유로 내과, 소아과를 간판으로 만물상 같은 병원을 여는 의사들이 있지만 이것과는 다르다.
'전문의가 되지 못하니 가정의가 된다'가 아니라 '가정의'라는 전문의로서 인정받는 것이며, '가정의'는 종합병원의 부장급과 같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 졸업 후 1년간 가정의 밑에서 실무를 배우고, 그후 병원에서 4년간 각과를 두루 거친다. 거기에 다시 야간 왕진의 수업을 반년간 한다. 모두 유급이기는 하지만 이런 자리를 계속해서 얻기는 어려우므로 보통 의대 졸업 후 10년은 걸린다. 가정의로서 개업하는 것은 35세경부터이다. 한 사람이 환자를 2천 명까지 담당할 수 있게 된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가정의를 한 사람 골라서 자기의 '주치의'로 등록한다. 프라이엠에 사는 노인도 가정의의 왕진을 받는다. 등록한 가정의에게 진찰을 받을 때 진찰료는 자기 부담이 아니다. 잘맞지 않거나 신뢰할 수 없는 경우는 1년에 한 번 등록하는 기회에 가정의를 바꿀 수 있다.
의료비의 대부부은 세금으로
덴마크에서는 의료 서비스의 비용이 거의 모두 세금으로 지불된다. 대학병원은 국립, 기타 병원은 다 도립이다. 병원의 의사는 공무원이다. 단 가정의만은 도와 계약을 맺는 '개업의'이다.
등로환자 1명에 대해 연간 약 4,400엔의 고정수입을 도가 의사에게 지불한다. 병이 났건 안 났건 말이다. 이것을 '인두지불(人頭支拂)'이라고 한다. 가정의는 평균 1,700명의 환자를 등록받고 있다. 여기에 일의 양에 따른 '실적지불'의 보수가 가산된다.
실적지불은 진료를 하면 할수록 보수가 많아지므로 과잉진찰, 과잉치료를 하거나 종합병원에 소개하는 일이 지연되는 등 단점도 있지만, 열심히 치료하는 가정의가 이익을 본다는 좋은 면도 있다. '인두지불'에는 많은 환자들의 신뢰를 받는 의사일수록 수입이 많아지고 보상을 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병용방식은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노인복지혁명' 역자 서문
저자는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유일한 여성 논설위원이다. 그녀는 일찍이 1970년에 역시 기자인 남편을 알코올중독자로 위장 잠입시켜 폐쇄된 정신병원의 내막을 고발하는 "정신병동 르포"를 연재하여 오늘의 정신병원 개방의 기수 역할을 한 바 있다([마음을 잃은 사람들], 예영커무니케이션, 1995, 96쪽). 그녀는 기자 특유의 호기심과 예민한 통찰력, 모성의 따스함과 보살핌을 더하여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현실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대책과 접근 방법을 학문적으로 소화했을 뿐 아니라 실제 현장을 몸으로 누비며 경험하면서 생동감 있는 글과 사진으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1990년도 초판 이후 21판이 나오면서 "일본의 노인복지 정책을 변화시킨 책"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이 책은 홀어머니를 모시는 그녀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경험한 개인적인 갈등을 자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사람의 문제로 확대, 고민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아 나선 이후 수년만에 정리한 글이다. 노인문제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던 그녀는 그 과정 속에서 북서 유럽의 여성, 아동, 장애인 등을 포함한 모든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 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인간 중심적인 복지제도의 실상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한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자존감을 지키고 높여줄 때 그 구성원 전체의 자존감이 고양되며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것을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현장경험을 통해 명쾌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IMF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경제불황 속에서 사회복지를 운운하는 것은 시의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국민소득이 세계 11위라고 자랑할 때, 우리의 사회복지적 삶의 질은 세계 59위였음을 직시해야 한다. 변화된 우리 사회공동체 구성원이 서로를 감싸주고 지지해 줄 때 복지사회의 길은 열리게 된다. 또한 개인이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연대적 책임을 지게 될 떄 무한한 자기성장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공공복지를 위해 개인이 지출한 비용은 결국 그 개인을 포함한 모든 구성원에게 몇 배의 큰 이익으로 환원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가장 효율적인 투자가 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이런 참되고 풍요로운 사회건설의 비법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유엔은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을 '노인의 해'로 지정했다. 아버지를 업어다 버린 지게를 아들이 챙기게 하는 우를 범할 것인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창출한 복지의 지지세력으로 '와상노인'을 일으켜 세워 앉힘으로써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존감을 지키며 후손과 이 나라에 복을 빌며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사회를 이룰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보통 사람과 함께 서로 보완하며 더불어 사는 복지사회로 큰 걸음을 내딛는 '노인의 해'가 되길 소망한다.
저자는 이 책의 판춴교섭에서 "저자의 염원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번역된 이 책을 읽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한국이 일본이 거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복지국가가 된다면 저는 충분히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라는 회신으로 판권을 사양하였다. 이 자리를 통해 감사드린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어 이 책 역시 "한국의 복지 정책을 변화기키는 책"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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