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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

보조기구센터 지하실이 놀랍다(비빌 7)

by 노인생활코디네이터 2024. 11. 30.

  100종류의 지팡이, 30종류의 전동휠체어

 

  '누워 있는 상태'를 없애는 또 하나의 강력한 장치를 알게 된 것은 1988년의 여름이었다. 그것은 '보조기구센터'이다.

  덴마크의 도는 인구 25만 내외로, 도쿄의 메구로 구만한 규모이다. 모든 도에는 도립 보조기구센터가 하나씩 있으며 거기에는 약 3,000 종류의 기구가 갖추어져 있다. 휠체어만도 100종류, 그 중 전동휠체어가 30종류, 지팡이가 근 100종류 기저귀도 야간용, 주간용, 여성용, 남성용, 뚱뚱한 사람용, 야윈 사람용 등 수십 종류가 있다. 부자유한 손으로도 식사나 요리를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자동기구도 갖가지다(사진 참조).  색채가 다양하여 실내장식이 될 것 같은, 보기에도 즐거운 느낌을 주는 것들 뿐이다.

 

 

  지체가 부자유로운 사람은 시읍면동이나 프라이엠의 직원과 함께 찾아온다. 센터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는 기구를 선택해 주고, 더 개량하고, 사용법을 철저히 지도한다. 서부  셰란도의 보조기구센터를 예로 들면, 직원 10명 중 직업요법사가 소장을 포함하여 6명, 물리요법사 1명, 용접이나 판금을 담당하는 기술자 2명, 사무직 1명, 부지 1,300평방미터, 전시실 630평방미터.

  시험적 대여도 한다. 사용자가 좋다고 하면 시읍면동이 사서 무료로 빌려준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은 생후 몇 개월의 아기부터 100세의 노인까지, 휠체어는 돌 된 아기부터 90세 노인까지 쓴다는 말을 듣고 그 넓은 이용층에 놀랐다.

 

 

  여자 손 하나로 큰 남자를 들어올린다

 

  그 해 9월, 소장인 안나 호름 여사(아래 사진)가 일본에 왔다. 재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와 나는 야나기하라 병원의 의사와 방문간호부의 안내로 도쿄의 서민주택가에 있는 '재택 와상 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했다. 야나기하라 병원은 일본의 재택의료의 개척자이다. 이 야나기하라 지구의 곤란한 조건하에서 일본으로서는 최고의 재택의료가 실천되고 있는 지역이다.   

동맥경화가 원인이 되어 양다리를 절단한 남성을 위해 안나 호름 소장이 휠체어를 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의 고령자들의 일상생활을 알게 된 나에게는 안나 여사와 함께 그것을 돌아다니는 것은 괴로운 체험이었다. 방문한 집에서 보는 굽은 채로 있는 수족, 코에서 위로 찔러 넣은 관, 방광에 찔러 넣은 관···. 어느 집에서도 안나 여사는 시종 웃는 얼굴로 그 사람들이 일어나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비방을 전수했다.

  노부부가 단둘이 사는 가정에서는 체구가 작은 부인이 반신불수의 큰 남편을 들어올 수 없어서 그녀의 남편은 잠자리에 누운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안나 여사는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간편한 리프트, 몸의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원판을 소개하고, 적은 힘으로 몸이 무거운 사람을 움직이는 요령을 심도 있게 지도했다.

  "휠체어를 샀지만 30분만 앉아 있어도 몸이 아파집니다. 그래서 외출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 집에서 안나 여사는 그 휠체어의 어디를 어떻게 개조하면 몸이 아프지 않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설명했다. 신경병으로 팔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집에 있던 재료를 써서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치 마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도구나 몸의 동작을 조금만 더 적절하게 이용하면 본인이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수발 드는 사람이 중노동에서 해방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보조기구의 위력, 작업요법사라는 전문가의 역량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방문이 끝나고 병원에 돌아오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함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만난 분들은 지금의 덴마크라면 모두 일어나 휠체어로 돌아다니고 있을 분들입니다. 덴마크에서는 입밖에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자립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20년 전, 내가 작업요법사로 일하기 시작했던 무렵에는 우리 나라에도 오늘 만나 본 몸져누운 노인들과 닮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증의 심신장애가 있는 사람들로 '수평인'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보조기구가 적었고 가정도우미도 적었습니다.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일본하고 똑같다.

 

 

  60년대부터 무료제공으로

 

  그녀가 작업요법사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것은 18세 때였다.

  작업요법사가 되는 학교의 입시경쟁률은 10대 1. 사회적 경험이 가산된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영국에 가서 정형외과센터 작업요법 부문의 조수가 되었다. 환자와 가족이 함께 와서 자택이나 마을 안에서 살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여기에서의 1년간의 경험을 인정받아 그녀는 덴마크 오프스의 작업요법사 학교에 입학, 작업요법사 자격을 취득하고 도립병원의 재활부문에서 뇌졸중이나 골절한 이들을 위해 일했으며 작업요법실의 개설과 동시에 그 책임자가 됐다.

반신불수라도 이런 부엌이면 주말에 오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휠체어용 자동차도 시읍면동에서 빌려준다.

 

  "환자들의 자택에 가서 실내 개조를 하던 중에 보조기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보조기구가 없으면 수발 드는 사람은 매일 무거운 사람을 들어올리느라 허리를 다치고, 자신도 장애가 있는 삶이 돼버립니다. 보조기구가 있어도 그것을 활용할 만한 전문가가 없으면 가족은 지쳐 버립니다. 부담이 한계를 넘으면 가족관계가 파괴됩니다. 보조기구와 가정도우미, 어느 쪽도 필요불가결합니다."

  덴마크에서 보조기구의 무료제공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이다.

  "처음에는 전문적 지식이 없는 시읍면동 직원들이 카달로그에서 기구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방문간호부들한테서 '사용하기가 힘들다', '쓸모없다'는 불평이 나왔습니다. 방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지금의 일본하고 똑같다.

  덴마크에서는 1970년대 말경부터 각 도가 보조기구센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보조기구를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을 연결시켜 그런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서부 셰란도에서는 안나 여사가 구상 단계부터 참여하여 1980년에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1976년에 '생활지원법'이 제정되어 제각기였던 지원이 단일화되었습니다. 보조기구의 지원도 그 주요조항에 포함됐으므로 일하기가 휠씬 쉬워졌습니다."

  시읍면동은 대개의 경우 본인이 바라는 보조기구를 대여하지만 때로는 '너무 비싸다'고 거절할 때도 있다. 예컨대 "시외곽에 살고 있으므로 쇼핑을 위해 휠체어 사용자가 운전할 수 있는 차를 대여해 달라"는 신청을 했을 경우 "더 편리한 곳에 주택을 마련할 테니 이사하면 어떻겠습니까?하고 시읍면동 측이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 대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주민은 도의 불복심사위원회에 호소한다. 도는 보조기구센터의 의견을 구하고, 센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통과된다. "필요한 것은 제공해야 한다"고 나라의 '생활지원법'에 써 있기 때문이다.

 

 

  재활용으로 몇 번이고 쓴다.

 

  1989년 봄에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보조기구센터에 가 보았다. '보조기구센터'의 운영은 스웨던 쪽이 덴마크보다 선배라는 안나 여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소장 구닐라 하마슐트 여사도 작업요법사 출신, 안나 여사처럼 웃는 얼굴과 금발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1968년에 3명의 인원으로 병원의 재활부문을 출범시켰고, 1973년에는 독립하여 보조기구센터를 개설했다.

  노벨상의 축하 파티로 유명한 시청의 전경이 보이는 호반에 있는 지금의 장소로 이사한 것이 1976년이었다. 전에 맥주공장이었던 건물을 이용한 것인데 그후 점차 확장해 갔다.

  직원 수는 40명, 작업요법사와 물리치료사를 합해서 10명, 작업실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12명, 창고의 관리자가 2명···.  물리요법사나 작업요법사는 센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택을 방문하여 보조기구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실내의 개조에 대한 조언도 한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전시, 지도, 공급, 수리, 개조, 그리고 개발이다.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가정을 방문하려는 작업요법사와 구닐라 하마슐트 소장

 

다양한 색채의 천으로 넘치는 재생실

 

  놀라운 것은 지하실이었다. 이용자의 몸에 맞게 보조기구를 교정하는 공작실이 거기에 있었다. 사용자가 사망하거나 몸에 맞지 않게 되어 돌아온 보조기구를 세척하는 방도 있었다. 세척된 보조기구는 재생실로 간다. 다양한 색깔의 천이나 스폰지 등의 재료로 채색된 화려한 방이었다. 도료를 도색하는 도장실, 마을 대장간 같은 용접실도 있다. 재생된 보조기구를 분류해 보관하는 창고에는 전동 휠체어용의 전지만을 위한 방이 하나 별도로 있었다.

각자에게 맞추어 개조하기 때문에 작은 공장에서 보는 것 같은 용접실이 있다.

 

  다른 동에는 연구개발을 위한 방이 있었다.

  지금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몸이 부자유한 어린이가 친구에게 자랑할 만큼 멋있는 보조기구, 지적 장애가 있는 어린이도 조작할 수 있는 보조기구,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의 의사소통을 도울 수 있는 초소형 컴퓨터를 내장한 장치, 그리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었다.

 

  당사자의 제안을 기초로

 

  스톡홀름의 서쪽 경계에 있는 국립핸디캡연구소를 1972년에 방문했던 때를 기억한다.

  여기서는 몸이 부자유한 사람의 보조기구에 관한 정보를 세계에서 수집하고 있었다. 그렇다 할 만한 것이 있으면 곧 그것을 구입한다. 그것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단체를 통해 시험한다. 이들 단체들은 복지 기기의 개발과 공급을 위한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런 기기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새 기기의 정보를 회원들에게 알리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용자가 되는 사람들의 평판이 좋으면 딱딱한 곳에 몇 번이고 부딪치게 하는 등의 내구력 테스트를 한다. 그러고 나서 제조원에 "이런 점을 개선한다면 정부가 대량구입하겠는데···." 하고 조건을 단다. 개량된 것이 도착하면 다시 테스트. 합격하면 '무료지급권고기기'의 명단에 실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공급하게 된다.

  "오늘 시운전에 성공한 이 승용차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

  '보이엘'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약간 흥분한 상태로 나에게 말했다.

  "발을 못 쓰는 사람이 손으로만 운전하는 차는 벌써 실용화되어 있습니다. 금년에도 600대 정도 만들었지요. 그것을 사기 위한 보조금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시운전한 이 차는 그것을 한층 더 개량했습니다. 이 차는 손을 겨우 조금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운전할 수 있답니다."

  그때 마침, 일본에서는 보통 차를 운전할 수 있는데도, '신체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재판소가 '운전을 불허한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