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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

먼저, 지적 장애의 세계에서-스웨덴에서

by 노인생활코디네이터 2025. 1. 18.

  그룹홈은 대가족의 단란함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도 가능한 한 '보통'의 생활상태를···" 이라고 하는, 덴마크에서 비롯된 노말리세르 사상은 이웃 나라인 스웨덴에 먼저 큰 영향을 주었다.

  스웨덴은 1968년에 법을 개정하여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지원하는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제5조에서 노말리세르의 원리를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시읍면동에서는 4,5명 단위의 '그룹홈'을 '보통의 생활'거점으로 해서 하나하나 계속 늘려 나갔다. 1965년에는 6명분이었던 것이 1986년에는 6,500명분이 되었으니 일본의 인구로 환산해 보면 9만 명분에 달하게 된다.

  1988년 가을, 나는 스톡홀름의 브엔데루튜르 단지에 계신 하라 쇼지-기요가 내외분 댁에 며칠 폐를 끼친 적이 있다. 시의 중심지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정말로 보통의 주택단지였다. 그 단지에도 세 통의 그룹홈이 아무런 티도 없이 들어앉아 있었다.

충증의 지적 장애가 있는 남녀 5명이 사는 그룹홈의 거실. 오른쪽부터 두번째와 네 번쨰가 수발을 드는 시 직원들.

 

  그중 한 집을 방문해 보았다. 하라 부부가 이웃간의 사귐이 있다고 해서 뒤따라갔다. 그곳에는 남녀 다섯 명이 시 직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35세의 남자는 내가 머물렀던 2시간 동안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좌우로 그 큰 몸을 계속 흔들고 있었다. 27세의 남자는 '더운증' 장애인의 독특한 얼굴을 하고 내 곁에 딱 달아붙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뱀이 좋다' 는 등 앞뒤가 없는 말을 뱉어내기도 했다. 어떻든 어지간히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이었다. 8년 전 대형시설에서 이곳을 택해서 옮겨왔던 모양이었다.

  다섯 사람은 각자 5평 정도의 독방을 쓰고 있었다. 녹색으로 단장된 방, 영화 배우 사진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야한 분위기의 방, 소형 피아노와 스테레오가 있어 음악적 분위기로 꽉 찬 방···. 어느 방이나 개성이 살아 있었다. 커튼과 가구는 직원과 함께 시장에 가서 본인이 골라 산 것이라고 했다.

  함께 쓰는 넓은 거실, 식당, 주방, 욕실, 직원의 방 등을 합쳐서 90평 규모였다.

 

지적 장애를 가진 성인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1974년 1986년
복지시설
부모의 집
그룹홈
자신의 아파트
45.7%
35.0
6.9
12.4
28.6%
27.8
25.5
18.1
  22,884명 25,440명

 

지적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1974년 1986년
복지시설
부모의 집
그룹홈
자신의 아파트
19.2%
66.4
14.4

3.1%
78.1
11.8
7.0
  14,109명 12,431명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살림집으로는 몸이 부자유한 이들을 위한 '서비스휴스'가 있다. 도우미가 금방 달려오는 체제가 준비돼 있지만 사생활을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 구조와 내부 장식들 하나하나를 연구 개발함으로써 수족이 부자유하든, 앞을 볼 수 없는 살아나갈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었다.

  '그룹홈'은 중증 지적장애인을 위해 생각해낸 것으로 사생활보다는 가정적인 따스함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분위기가 옛날 대가족 제도의 살림집과 닮았다.

  "여기는 시설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식단도, 여가시간을 보내는 법도 자기가 좋은 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생각나면 두셋이 몰려 영화구경을 가기도 하고, 물론 방에서 혼자서 보내는 것 또한 자유지요."

  교대로 같이 살아가는 '준가족'인 시 직원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지원법의 치지를 더욱 보강한 <신지원법>은 1986년 7월 1일부로 시행됐다. 지적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더 이상 시설로 보내는 일은 금지됐다. 성인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시설 대신에 그룹홈이 제공되었다.

  주중에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아침에 집을 나온다. 출근 장소는 보통의 직장이거나 장애를 배려한 보호직장이나 '다그센터'이다. '다그' 란 스웨덴어로 '주간', 말하자만 '데이센터'이다. 중증장애인들이 주간에 모여서 작업이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사회성을 익혀가는 곳, 사회로 나아가는 중계역 같은 곳이다. 시읍면동에서 운영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행정관청의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다.

  인구 160만의 스톡홀름에만도 32군데, 모두 똑같이 역에서 가까운 편리한 곳에 있다. 그 중의 하나인 '하룬다 다그센터'를 방문했다. 일본인인 이세가와 아시코 씨가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본인이 정한다

 

  아침 8시, 직원들이 모여든다. 8시 반, 회원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또는 휠체어용의 '리프트버스'로 '출근' 해 온다. 60명의 회원과 20명의 직원이 열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가죽공예, 직물, 목공, 인쇄, 폐품 재생, 재봉, 농사, 청소미화, 야외활동, 포장 등, 커피를 마셔가며 하루의 일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중 네 그룹은 센터에 남아서 일하고 나머지는 아파트나 역전의 상점 또는 40리나 떨어진 농장에 가기도 한다.

  "직원의 역할은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회원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가능성을 찾고 또 넓혀 갑니다. 동료들과 함께 활동하는 중에 계획하는 능력, 일을 처리하는 능력, 평가하는 능력, 사회적응 능력 등이 발달해 가도록 지원하지요. 이런 것들이 우리 직원들의 역할이랍니다."

  이렇게 조이 베니구 소장을 설명해 주었다.

각 그룹으로 나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룹'도.
직물짜기는 다그센터에서 인기 있는 작업이다. 이 남성도 작업중이다.

 

  이 센터가 생긴 것은 1974년이었는데 당시엔 학교의 연장선 상에 있는 듯했다. 회원의 능력에 미루어서 훈련했다. 20명의 직조 그룹과 30명의 작업요법 그룹으로 나누었고, 직원은 선생, 회원은 학생, 이런 식의 상하관계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1978년에 개혁이 시작되었다. 조이 씨가 직원들의 열렬한 요청에 의해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태생의 네덜란드 출신이다. 백인의 피가 4분의 1 혼혈되었다지만 얼굴 모습은 확연히 동양인이다. 일본의 복지시설 직원들이라면 인도네시아인을 소장으로 애써 초정할 수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들 국민의 평등사상이야말로 진짜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이 씨는 직원들의 기대대로 '리더쉽'을 발휘했다. 1978년에는 재봉그룹이 단지의 ㅂ장 하나를 빌려 작업장을 차리고 3년 후에는 점포도 열었다. 1983년에는 가죽공예를 수놓는 그룹이 역 구내 상점가에 '아틀리에'를 겸한 가게를 냈다. 여기서는 밤에 시민을 대상으로 강좌를 열고 있다. 1987년에는 청소미화 그룹이 단지에서 일을 주문받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는 사람들의 그룹도 생겨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본인이 정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라고 조이 씨는 힘주어 말한다.

 

  사회로 향하는 가교  '유리통로'

 

  어느 날 이곳의 직조그룹이 니포타 다그센터의 직조그룹과 교류행사가 있다기에 나도 따라갔다. 이 다그센터에는 이름난 명물식당이 있었다. 이웃한 사무실 빌딩 사이를 연결하는 유리로 만든 통로의 이름이 '그라사데 공켄(유리통로)' 이었다. 그 이름에는 사회로 향하는 밝은 가교가 되었으면 하는 염원이 배어 있었다.

'그라사데 공켄'은 맛있는 빵으로도 인기가 있다.

  지적 장애를 가진 회원 18명과 직원 5명이 고기요리, 샐러드, 빵, 배달의 네 그룹으로 나뉘어서 하루 건너 바뀌는 메뉴에 맞춰 60명분을 만든다. 식탁보의 세탁과 다림질은 세탁그룹이 맡고, 커튼은 염색그룹의 작품이다. 회원의 작품인 판화나 자수도 전시되어 있다.

시설에서 있을 때는 약을 사용하던 여성

 

  인삼의 썹데기를 벗기고 있는 여성(위 사진)은 전에는 머리를 벽에 박는 위험한 고질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일을 시작하고부터 싹 나아 버렸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다. 게다가 성과가 실감된다. 그것이 자해행위를 잊게 해 준 것이다.

 

  '보통 생활'은 주택지에 있는 보통의 큰 집에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과 같이 통근하고 통학하며 사회와 교류하고 여가를 즐기며 이성과 교제를 한다. 자기 결정이 존중된다.

  한 예를 들어 보면,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의 '록 그룹'이 여러 개가 있는데 연 1회 스톡홀름에서 제일 큰 홀을 빌려서 성대한 콘서트를 개최한다고 한다. 그 중심 인물이 일본에서 온 '오오다케' 씨이다. 이 그룹홈에도 매주 가르치러 온다.

  스톡홀름에서 수요일은 시영 수영장의 수온을 32도까지 올려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형편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은 그곳이 보육원의 어린이나 정년퇴직한 노인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마당이 된다고 한다.

  

  일본의 풍경이 문든 내 눈에 떠올랐다. 자기 할 일을 고를 수도 없이 적은 보수를 받으며 하청받은 일을 부끄러운 듯이 묵묵히 하고 있는 '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박봉을 감내하는 소규모 공동작업소의 직원, 자금을 구해 본다고 뛰어다니는 늙은 어버이들.

  '동경은 땅값이 높다', '반대운동도 있다'는 이유로 멀리 떨어진 '아키다 현'이나 '야마가다 현'의 위탁시설로 보내지는 동경 태생, 동경 출신의 지적 장애인들.

  이들은 "어디서 살고 싶으십니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라고 진지하게 질문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번도 없다.